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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 칼 마르크스
사회
 

46년 9월 총파업‧10월 인민항쟁 80주년, 노동자‧농민의 거대한 저항이 남긴 교훈


  • 2026-11-07
  • 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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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설명: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된 항쟁이 확산된 지역(출처_정해구 <10월 인민항쟁 연구>, 열음사, 1998, 190쪽 지도)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식민지 지배체제가 무너지자 전국에 인민위원회와 노동조합‧농민조직이 만들어졌다. 노동자‧농민들은 공장을 접수하고 치안과 식량 문제를 해결하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했다. 억압받던 민중이 새 나라의 주인이 될 혁명적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인민위원회의 행정권을 빼앗고 조선인민공화국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친일 관료‧경찰을 재등용하고 우익 세력을 지원했다. 노동자‧농민의 권력 수립을 막고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통치질서를 세우려 했기 때문이다. 이는 혁명을 가로막으려는 반동이었다.

반면 인민위원회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에 큰 영향력을 가진 조선공산당은 미소공동위원회에 기대를 걸며 대미협조노선을 이어갔다. 그러나 냉전 격화로 1946년 5월 미소공위가 휴회하고 미군정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조작해(작년 12월 재심으로 무죄 선고) 조선공산당 핵심 간부들을 체포하는 등 탄압을 강화하자, 7월에야 미군정을 압박하는 제한적 공세인 신전술로 전환했다.

미군정의 경제정책도 민중의 삶을 파탄냈다. 쌀값 폭등과 식량난 속에 일제강점기 때의 강제 공출이 부활했다. 민중의 분노가 쌓여가던 중 철도노동자 25% 감원과 일급제 전환까지 추진되자 분노가 폭발했다.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 8,000여 명이 시작한 파업은 곧 전국으로 번졌다. 약 25만 명이 참여한 9월 전평 총파업에선 쌀 배급과 임금 인상, 노동운동의 자유뿐 아니라 정치범 석방과 인민위원회로의 권력이양도 요구했다.

미군정은 경찰과 우익단체를 동원해 파업을 진압했다. 그러나 10월 1일 대구에서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가 사망하자 노동자‧농민‧학생들이 봉기했다. 항쟁은 남한 각지로 확산됐고, 미군정은 계엄령과 무력 진압으로 맞섰다. 3만 명 넘게 체포되고 1,000여 명이 사망했다.

미군정 3년간 가장 큰 투쟁이었던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은 노동자‧농민의 거대한 힘을 보여줬다. 그러나 투쟁은 통일된 지도력 없이 분산돼 미군정의 조직적인 탄압을 이겨내지 못했다. 뒤늦게 대결노선으로 전환했던 조선공산당도 투쟁을 방어하고 권력 장악으로 이끌 혁명적 지도력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 결과 남한의 혁명적 정세는 꺾였고 노동자‧농민은 다시 긴 억압에 직면했다.

80년 전 이름 없는 노동자‧농민들은 스스로 조직하고 싸우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힘을 보여줬다. 그들이 목숨 걸고 남긴 투쟁의 교훈을 기억하자. 조직적 탄압에 맞서 권력 장악으로 나아갈 혁명적 노동자당이라는 무기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월간 정치신문 <노동자투쟁>(서울) 83호, 2026년 10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