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진 설명: 1927년 4월 12일, 50만 명의 군중이 국민당 군대의 노동자규찰대 무장해제에 항의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다.(출처: 중국 인터넷 매체 'SOHU', 광저우시 황푸구 기록관)
1926년 7월, 국민당 장제스는 북벌을 개시한다. 비록 그는 중국의 새 지배자가 되고 싶었을 뿐이지만, 노동대중은 북벌을 투쟁의 방아쇠로 여겼다. 1926년에 100만이 훨씬 넘는 노동자가 파업했으며, 후난성 농민회원 수는 2개월 만에 100만에서 200만으로 늘었다.
국민당군이 상하이 근처에 오자 1927년 2월 19일에 35만 명이 파업하고 거리로 나섰다. 3월 21일 총파업에도 50~80만 명이 참가했으며, 훈련된 5,000명의 규찰대가 봉기의 주축이 됐다. 노동자들이 경찰서, 전화국 등을 접수했다. 국민당군 없이 이미 상하이는 노동자의 도시가 됐다.
그런데 이때 스탈린의 통제를 받은 중국 공산당은 기회주의 정책을 펼쳤다. 그들은 ‘장제스를 환영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임시정부를 구성해 자본가들에게 갖다 바치는 등 국민당을 안심시키려 골몰했다.
그러나 봉기 직후 상하이에 들어온 국민당군은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자본가·깡패들과 결탁해 노동자들을 무장해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4월 12일, 깡패들이 노동자 지도자들을 살해하는 것을 시작으로 국민당군이 잔인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노동자 규찰대를 해체한 뒤 저항하면 곧바로 총살했고, 수천 명의 공산당원과 동조자를 체포해 처형했다. 총파업과 항의 시위에 나선 노동자·학생 수백 명을 죽였다. 단발 여성들을 급진주의자로 간주해 몸을 훼손하고 머리를 깎아 시신을 전시했다. 노동자 혁명은 끔찍하게 패배해 목이 잘렸다.
당시 스탈린 일당은 국제 노동자혁명 기구인 코민테른을 장악하고 있었다. 스탈린 일당은 소련 관료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세계 혁명을 포기한 채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 안에 들어가 충성하도록 길들였고, 장제스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찬양했다. 그들은 장제스의 광저우·상하이 쿠데타 후에도 우한에서 똑같이 국민당 좌파에 대한 기대를 조장했다가 수많은 노동자가 학살당하게 만들었다. 노동자 계급이 부르주아 정치 세력으로부터 철저히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마르크스·레닌의 사상과 스탈린의 계급연합 노선은 완벽히 달랐다.
부르주아 정치세력에 속으면 노동자 계급은 비참해진다. 오늘날에도 ‘노동자·서민을 위하는’ 척하는 부르주아 정치세력에 결코 속지 말아야 한다.
월간 정치신문 <노동자투쟁(서울)> 66호, 2025년 5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