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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 칼 마르크스
사회
 

계엄과 저항의 역사② -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그리고 좌절된 계엄시도


  • 2025-03-06
  • 30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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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설명: 울산 현대계열 7개 계열사의 무기한 휴업조치에 항의, 현대중공업 운동장에서 8월 17일부터 이틀째 농성을 벌여온 노동자와 가족들은 18일 덤프트럭과 지게차 등을 앞세우고 16km 거리시위를 벌인 뒤 울산공설운동장으로 옮겨 농성을 벌였다. 7·8월 노동자대투쟁의 '백미'였던 이틀간의 집회는 바로 현대그룹노조협의회 주도로 이뤄진 사실상 '울산지역 현대그룹 노동자총회'였다.(사진 출처_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광주 민중을 학살하고 권위주의 통치를 이어갔던 전두환 정권은 87년에 박종철 열사의 사인을 은폐하고 대통령 직선제조차 거부해 민중의 거대한 분노를 샀다. 이에 6월 10일 24만 명이 시위했고 6월 18일에는 전국적으로 200만 명이 모이는 기염을 토해냈다.


전두환은 6월 19일 군 수뇌부를 불러 대학 캠퍼스와 여러 도시에 군을 배치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이 계엄 시도는 좌절됐다. 군을 투입하면 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것이 분명해 군부와 미국 모두 계엄령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결국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항복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직후 대규모 노동자투쟁이 벌어졌다. 울산 현대엔진노조 결성투쟁을 시작으로 조선, 중공업과 자동차 등 울산 현대계열사 전체로 투쟁이 확대됐다. 또 부산, 마산, 창원, 거제 등 남부지방에서부터 인천, 성남, 구로 등 수도권 노동자들까지 전국 전 산업으로 투쟁이 들불처럼 번졌다. 3개월 사이에 3,311건의 파업이 전국에서 벌어져 민주노조의 깃발이 ‘거제에서 구로까지’ 물결쳤다.


6월 항쟁으로 군부독재는 치명타를 입고 부르주아민주주의로 전환해 갔다. 하지만 6.29 선언으론 노동자 민중의 삶이 개선되지 않았기에, 노동자 계급은 7.8.9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자기 삶을 바꾸려고 역사의 무대 전면에 나섰다.


87년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첫째, 노동자 민중의 단결투쟁력이 드높을 때만 계엄 시도든 극우의 발호든 확실히 제압할 수 있다. 둘째, 6월 항쟁 때 김영삼과 김대중은 친위 쿠데타설이 돌자 ‘신중론’을 펴며 집회 연기를 주장했고, 노동자대투쟁 때는 ‘파업 자제’를 촉구했다. 지금 이재명과 민주당이 내란공범들과 ‘국정안정협의체’를 꾸리려 하고, 주52시간제를 허물려 하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민주당을 조금도 믿어선 안 된다. 셋째, 87 노동자대투쟁이 잘 보여줬듯 노동자의 삶은 노동자의 투쟁을 통해서만 개선할 수 있다. 넷째, 6월 항쟁과 7.8.9 노동자대투쟁의 한계를 넘어 노동자 계급이 자본가세상을 바꾸려면 진정한 노동자당이 반드시 필요하다.


월간 정치신문 <노동자투쟁>(서울) 62호, 2025년 1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