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진 설명: 5.18 직전의 전남대학교 정문시위 모습 ⓒ전남대
12월 3일 윤석열의 계엄 포고령에는 ‘정치활동 금지’ 및 ‘파업, 태업행위 금지’ 등이 들어있었다. 이것은 전두환의 80년 5월 계엄령과 똑같다. 윤석열은 전두환의 독재를 따르려 했다. 우리도 그 독재에 저항했던 선배 노동자·민중을 따를 필요가 있다.
5월 18일부터 공수부대는 쇠심이 박힌 곤봉으로 학생들을 내리치고, 대검으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찌르고 베었다. 5월 20일부터는 집단 발포까지 했다. 공식 사망자는 166명, 행방불명자를 포함하면 345명이다.
그러나 광주 민중은 결코 무기력하게 학살당하지만은 않았다. ‘학살당한 광주’ 다음에는 ‘무장한 광주’가 있었다. 그 중심은 기존에 조직되지 못했던 노동자들이었다. 20일 저녁, 수백 대의 택시 노동자가 군경 저지선을 뚫기 위해 집결했고, 건설노동자, 화순 탄광 노동자 등 수많은 노동자가 총을 들었다. 무기를 들어 도청을 탈환하고 죽음으로 끝까지 사수한 사람도 대다수가 노동자였다.
도청 탈환 후 “무기를 반납하고 계엄군에 항복하자”고 주장한 세력도 있었다. 재야 민주화인사, 지역 유력 정치인, 종교인, 교수 등으로 구성된 ‘수습대책위’였다. 교전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그들은 사태수습을 명분으로 수천 정의 무기를 회수해갔다. 26일 도청 앞 광장에 집결한 노동자와 시민은 항복을 거부하고 수습파를 내쫓은 후 새로운 투쟁 지도부를 세워 결사 항전했다.
80년 광주를 단순히 ‘민중 학살’이나 ‘민주화 운동’으로 기억해선 안 된다. 5월 광주는 노동자들이 주축이 돼 민중이 지배자들에 맞선 자랑스런 봉기이자 항쟁이었다. 그래서 혁명시인 김남주는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라”고 했다. 또한 광주는 한 줌 지배자 없이도 노동자·민중 스스로 권력을 세워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생생히 보여줬다.
윤석열 같은 지배자들은 언제든 노동자·민중을 폭력적으로 짓밟으려 한다. ‘민주화’의 탈을 쓴 야당도 권력이 없을 땐 80년 ‘수습파’처럼 타협을 설교하고, 권력을 쥐었을 땐 폭력경찰을 동원해 파업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따라서 단지 계엄 전 ‘민주적’ 일상의 회복이 우리의 목표일 순 없다. 이번 사태를 노동자·민중이 각성하는 계기로 삼고 힘을 길러야 한다.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이라는 원대한 전망을 가슴에 품어야 한다. 그것이 광주 항쟁의 교훈이다.
월간 정치신문 <노동자투쟁>(서울) 62호, 2025년 1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