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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 칼 마르크스
사회
 

해방 80주년 – 1945년 식민지 해방과 분단


  • 2025-09-18
  • 8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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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설명: 38선은 1945년 8월 10일 밤, 미국 군인 두 명이 몇 시간 만에 지도 위에 직선으로 그은 급조된 선이었다.(출처_벌거벗은 세계사 유튜브 화면 갈무리)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이 라디오 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조선 민중에겐 35년간 이어진 식민지배의 끝, 곧 해방을 의미하는 선언이었다. 민중은 환호했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로부터 벗어나자 곧바로 미국과 소련이 새로운 점령자로서 조선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35년의 식민지배 동안 제국주의적 착취와 억압에 맞서 싸워온 조선 민중은 일본의 항복 직후 식민 잔재와 봉건 세력을 청산하고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나섰다. 불법화됐던 정당이 활동을 재개했고, 전국적으로 자치조직인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결성됐다. 이 위원회의 지도부는 민족주의자들이었지만, 현장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건 공산주의자들이었다. 해방 때까지 변절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이어와,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1945년 9월 6일엔 건준 주최의 대표자대회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됐다.


그러나 2차 대전의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은 조선 민중이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을 각자의 세력권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공동 관리’(신탁통치)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8월, 일본의 항복이 임박하자 미국은 소련군의 한반도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자고 제안했고, 소련은 이를 수락했다. 미군이 남쪽을, 소련군이 북쪽을 점령하는 동안 조선 민중의 의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처럼 38선은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이해에 따라 임시 방책으로 제안된 것이었다. 그러나 1948년 남과 북에 각각 미국과 소련의 통제를 받는 단독정부가 세워지면서 사실상 국경선이 됐다. 이후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과 휴전을 거치며 약간 조정돼 군사분계선(휴전선)이 됐고, 한반도의 분단은 고착됐다. 


강대국의 이해관계는 한 민족의 자결을 가로막고 한반도를 대립하는 두 지역으로 갈라놨다. 이는 한국만의 비극이 아니었다. 중동에서 제국주의 열강이 인위적으로 설정한 국경, 팔레스타인 땅이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강제 분할된 역사 역시 민족 분열과 갈등을 낳았다. 제국주의가 박아놓은 분열의 쐐기는 여전히 작동하며, 한반도의 남북 갈등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민족 간 대립과 갈등을 재생산하고 있다.


월간 정치신문 <노동자투쟁> 69호, 2025년 8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