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팜플렛이 나왔습니다.
『1968년 5월 프랑스』
영국 워커스파이트(Workers’ Fight) 지음, 노동자투쟁(서울) 옮김, 47쪽, 3000원
<발간사>
노동자 계급이 자본가 세상을 뒤엎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단호하게 “그렇다”고 대답하는 단체는 매우 적다. 그렇게 대답하는 단체라도 그 사상을 올곧게 실천으로 옮기는 경우를 찾기는 매우 힘들다.
프랑스에서도 1968년 5월 직전까지 ‘적어도 선진국에선 노동자 계급이 더 이상 혁명적 역할을 할 수 없다’, ‘학생과 지식인이 사회변혁의 주력이 될 수 있다’와 같은 사상이 소부르주아 지식인 사이에선 꽤 퍼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상은 5월 총파업의 물결에 순식간에 휩쓸려 나갔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에서 “노동자 계급은 정세의 흐름에 따라 즉흥적으로 유례없는 혁명활동을 전개하도록 동력이 주어진 계급”이라고 했다. 이 말은 역사를 모르면 허풍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1904년엔 전부 합쳐 겨우 2만5천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했는데, 1905년엔 정치파업과 경제파업을 합쳐 286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했다. 전년에 비해 무려 115배 늘어난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놀라운 잠재력은 68년 5월 프랑스에서도 잘 드러났다. 68년 5월 13일, 노총 관료들은 하루 파업에 그치려 했지만, 파업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총파업이 절정에 이르렀던 5월 25일엔 800만에서 100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했다.
68년 5월을 격렬한 학생 시위 정도로만 이해하고, 대규모 노동자 계급의 행동을 간과한다면 편협하게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런 시각은 노동자 계급의 저력을 끊임없이 감추고 싶어 하는 자본가 계급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도 그런 시각으론 68년 5월 운동으로부터 적절한 교훈을 얻고 미래를 대비할 수 없다.
68년 5월에 노동자 계급은 왜 거대한 잠재력을 끝까지 발휘하지 못했을까?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는 승부수를 던져, 운동을 부르주아민주주의 틀 안으로 가두려 할 만큼 드골이 교활하고 노련했기 때문일까? 스탈린주의 공산당과 CGT(노동총동맹) 관료들이 총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총파업 물결에 올라탄 다음 직장 복귀를 조직했기 때문일까? 둘 다 맞지만, 드골 정권이나 스탈린주의 공산당과 노총 관료들은 자기 역할을 충실히 했을 뿐이다.
이 팜플렛에서 평가하듯, “(노동자 계급이 권력 장악으로까지 나아가려면) 노동자 계급의 의식적 분자들이 명확한 목표 의식을 갖고 계급적으로 동원돼야 했으며, 노동자 대다수가 그 목표를 지지해야 했다. 또한 노동자 계급이 정치적 위기를 해결할 유일한 세력으로 보여 적어도 소부르주아 계급을 중립화해야 했다. 끝으로 노동자 계급을 권력으로 이끌 수 있는 조직, 즉 혁명정당이 필요했다.” 68년 5월에 결정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노동자 계급에 깊이 뿌리를 내린 혁명정당이었다.
노동자에겐 조국이 없다. 노동자의 조국은 세계다. 68년 5월은 87년 노동자대투쟁과 마찬가지로 한국 노동자 계급이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전통이다. 68년 5월은 어떤 형태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 그때 굳세게 전진하려면 노동자 계급에 깊이 뿌리를 내린 혁명정당을 지금부터 맹렬히 준비해 나가야 한다. 노동자 계급의 힘으로 자본가 세상을 뒤바꾸고 싶어 하는 이들이 68년 5월을 이해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데 이 팜플렛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2024년 11월
노동자투쟁(서울)
<목차>
들어가며
알제리 전쟁과 드골 정권
폭발의 도화선이 된 불꽃
전환점
파업의 물결
자유와 민주주의의 축제
드골, 확률을 저울질하다
그르넬, 총파업을 꺾지 못하다
좌파 정당과 드골의 ‘쿠데타’
CGT가 사업장 복귀를 조직하다
혁명적 상황?
오늘의 시각에서 본 1968년 5월
<본문 속으로>
“1968년 5~6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태는
선진국에서는 대중적 사회운동이 '불가능하다'는 온갖 헛소리를
거의 하룻밤 사이에 일소시켰다.
실제로 약 3주 만에 수백만 명이 공동의 목적을 갖고 행동에 나섰다.
총파업은 더 이상 낭만적인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됐다.”
“이는 서구 노동자 계급이 낡고 부패한 세력이 아니며,
노동자 혁명의 전망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학에서는 사회 전반에 퍼져 있던 모든 진부한 사고와 편견에 대한 건강하고 체계적인 비판, 그리고 새로운 사상이 꽃피웠다.
동시에 자유, 민주주의, 연대, 힘의 축제 같은 흐름이 전국을 휩쓸었다.
공장, 사무실, 공공임대주택, 심지어 농촌에까지 이런 흐름이 퍼져 나갔다.”
“우리가 결정적 순간에 노동자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고 영향력이 부족해
운동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면,
우리 혁명가들은 그런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지금부터 신뢰와 영향력을 쌓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