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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 칼 마르크스
국제
 

네팔, 이틀간의 봉기


  • 2025-10-16
  • 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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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8일과 9일, 네팔은 수도 카트만두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진정한 혁명적인 나날을 맞으며 기존 정권이 크게 흔들렸다. 


사건의 발단은 9월 4일 정부가 발표한 법령이었다. 이는 왓츠앱, 페이스북 등 여러 소셜미디어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조치였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서 부패를 폭로하고 고발하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팔 사회에 만연한 부패는 기득권층 자녀들[‘네포 키즈’]의 행태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들은 빈곤에 시달리는 3천만 주민의 현실과는 극명히 대조적으로, 샴페인을 들고 방탕한 파티를 즐기며 이를 거리낌 없이 과시해 국민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2008년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마오주의) 공산당이 이끌어온 정권은 사회가 조용하고 통제되고 있다고 여겨, 자신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금지 조치는 대중과 청년들에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도발로 받아들여졌다. 네팔 노동계급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백만 노동자로 이뤄져 있는데, 이들이 가족과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소셜미디어였다. 또한 대다수 농촌에 사는 네팔인들에게 소셜미디어는, 특히 자녀들과 연락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그런데도 집권 세력인 공산당과 그 동맹인 의회당은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고 부유층과 특권층만을 위해 통치했으며, 이미 부패로 깊이 썩어 있다는 점을 수없이 드러냈다. 


9월 8일, 주로 학생들로 구성된 ‘젠지[Gen-Z, Z세대]’가 이 조치에 맞서 시위를 조직하자고 호소했고, 곧바로 운동은 급속히 확산됐다. 수도 카트만두(인구 약 100만)와 주요 도시의 젊은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권력의 상징들, 특히 의회를 향해 행진했다. 경찰이 총을 쏴 최소 19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는 시위대를 위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전투적으로 만들었다. 전국적으로 희생자는 72명에 달했으며, 일부 경찰도 사망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나라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9월 9일, 수십만 시위대가 청년들과 함께 거리로 나와 권력의 모든 상징에 맞섰다. 의회는 불길에 휩싸여 파괴됐고, 법원을 비롯한 여러 정부 건물도 불타올랐다. 교도소의 문이 열리자 12,500명이 넘는 수감자가 스스로 탈출했다. 총리는 관저에서 끌려 나왔으며, 재무부 장관을 포함한 두 명의 장관은 광장으로 끌려가 대중의 환호 속에 심하게 구타당한 뒤, 상징적으로 강물에 던져졌다. 이날은 청년들뿐만 아니라 소기업 노동자들과 소상공인들도 합세해 카트만두와 전국을 장악했다. 경찰은 사실상 무력화됐고, 군대는 그날 하루 병영 안에 머물며 움직이지 않았다. 


같은 날, 9월 4일의 법령은 철회됐고 정부 전체가 사임했다. 정치 지도자들이 순식간에 신뢰를 잃자, 육군 참모총장은 대법원 고위 인사들과 공동으로 국민의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당을 배제하며, 몇 달 안에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며칠 뒤, 전(前) 대법원장이 총리로 임명됐다. 지배층을 대표하는 세력들에겐 권력을 공백 상태로 두거나 공식 대표자 없이 방치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흔히 이런 상황에서 그렇듯, 정부를 무너뜨릴 만큼의 힘과 에너지를 발휘한 민중은 정작 스스로 권력을 행사할 준비는 돼 있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을 모면한 국가 지도자들은 아마도 안도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육군 참모총장은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군대를 거리로 내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네팔의 가난한 민중은 자신들의 힘을 자각했으며, 이 경험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출처: 프랑스 혁명적 노동자 조직 LO 기사, 2025년 9월 17일

월간 정치신문 <노동자투쟁(서울)> 70호, 2025년 9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