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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 칼 마르크스
국제
 

100년 전 1920년 9월: 동방 인민 대회


  • 2025-02-17
  • 333 회

100년 전

1920년 9월: 동방 인민 대회 


1920년 9월 1일, 코카서스의 바쿠[현재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에서 동방인민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를 소집한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 제3인터내셔널) 지도자들에게, 이 대회는 러시아혁명이 아시아와 식민지들의 피억압 대중을 각성시키고,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신호탄이 되기를 되풀이해서 바랐던 레닌의 희망을 상징했다.


1차 세계대전은 식민지 인민을 유럽의 도살장으로 밀어넣었다. 아프리카와 인도 병사들은 자기 지배자들이 어떤 야만적 참상을 만들어내는지를 참호 속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들은 다시 노예로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악한 제국주의자들이 패배자로부터 약탈한 전리품을 나눠 갖는 방식을 보고, 그들은 터키에서처럼 투쟁을 시작하기 위해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뒤따랐다. 


코민테른 2차 대회를 앞두고 레닌은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작성해 이런 상황에 따른 전망과 공산주의자들의 당면 임무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이런 나라들에서 혁명적 민족해방 운동들을 지지하되, 독자적인 공산주의 운동도 건설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코민테른 2차대회(1920년 7월) 직후에 바쿠에서 동방인민대회를 소집했다. 이 도시를 선택한 것 자체가 상징적이었다. 미국 공산주의 대의원이었던 존 리드는 “영어로 바쿠를 뭐라고 발음하는지 아십니까? ‘오일’입니다. 바쿠의 노동자들은 러시아,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노동자들로 구성돼 있는데, 이들은 석유로 자본가들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고되게 일해 왔습니다. 이 노동자들은 혁명을 위해 착취에 맞서며 단결해 왔습니다.


모스크바 대표단은 내전으로 황폐해진 러시아를 관통해서 동방인민대회에 참가했다.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을 대표했던 알프레드 로스메는 자신이 바쿠에서 무엇을 봤는지 다음과 같이 썼다. “대회가 소집됐다. … 온갖 동방의 옷이 놀랍고도 다채로운 그림을 연출했다. 여러 언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었던 연설들은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사람들은 열정적 관심을 갖고 그 연설들을 들었다.”


거의 2,000명의 대표자가 참가했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 체첸, 타지키스탄, 우즈벡 등 ‘인민의 감옥’이었던 러시아 짜르체제로부터 억압당했던 민족들에서 많은 사람이 왔다. 일부는 터키나 페르시아[현재의 이란]를 통해 왔다. 인도, 중국, 한국에서도 참가했다. 그들의 여정은 위험했다. 페르시아에서 온 두 대표자는 영국 공군이 배를 폭격해 사망했다. 영국 배들은 터키 대표자들이 흑해를 통과하는 것도 방해하려 했다.


참가자 모두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대회 사무국은 두 경향, 즉 공산주의자들과 무당파로 구성됐다. 코민테른 의장이었던 지노비에프는 처음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여러분이 어느 당에 속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직 이런 질문들만 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노동자인가요? 여러분은 노동자대중의 일부인가요? 여러분은 내전을 끝내길 바라고 억압자들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고 싶어 하나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검토하기 위해 와서 머리를 맞대죠.”


모든 대표자가 젊은 소비에트 공화국과 손잡고 해방을 쟁취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래도 뜨겁게 토론했고, 때때로 불일치가 깊어지기도 했다.


젊은 소비에트 권력이 중앙아시아에서 취한 정책이 날카로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투르키스탄의 무당파 대표자, 나부타베코프는 ‘유럽인들의 편협한 민족주의 경향’에 대해 불평했으며, 레닌과 트로츠키, 지노비에프를 초대해 그들이 현장에서 그 문제를 확인하도록 했다. 투르키스탄 공화국은 모든 짜르 제국의 식민지에 민족자결권을 보장한다(그리고 독립의 자유를 갖고 연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는 볼셰비키의 선언 덕분에 독립을 쟁취했다. 하지만 일부 소비에트 간부들 사이에선 중앙집권적 짜르 제국에서 유래한 대러시아 민족주의 경향이 존재했다. 그래서 피억압 민족의 노동자계급이 느낄 수 있는 ‘피억압 민족 노동자계급에 대한 반감’을 빨리 없애기 위해서 주의 깊게 처신해야 하며, 일정한 양보도 해야 한다고 코민테른 대회에서 특히 레닌이 경고했다.


모든 대표자가 자국의 억압적 현실에 대해 설명했다. 다음과 같은 테제가 발표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동방 노동자대중의 혁명은 외국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는 데 머물지 않을 것이다. 술탄[이슬람국가의 군주], 샤[이란의 국왕], 에미르[이슬람국가의 왕], 파샤[터키‧이집트의 주지사], 베이[터키‧이집트의 고위 인사들]의 통치를 유지하고, 그들이 노동자들을 지배하려는 체제를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혁명은 사적 소유의 ‘신성불가침’ 앞에서 주저앉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농업혁명으로 뻗어나갈 것이며, 토지를 노동자들의 손에 넘기고, 모든 착취를 철폐할 것이다.”


대회엔 50명가량의 여성 대표자도 참가했다. 그들은 모든 영역의 남녀평등을 힘차게 요구했다. 그중 투르키스탄 여성 비비누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 동방 여성은 남성보다 무한히 힘겹게 착취당해 왔다. 그리고 우리는 동방의 무슬림 여성이라는 이 영원한 노예의 모든 어두운 측면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억눌렀던 악몽에서 깨어나고 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굴레를 뒤흔들고 있다. 우리는 우리 힘을 최대한 동원해 동지들과 연대할 것이다. 제3인터내셔널 만세! 투르키스탄 여성 노동자 만세!”


바쿠 대회는 가시적 결과를 바로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식민지에서 공산당들을 차례로 건설했다[이 땅에선 1925년에 조선공산당을 창건했다]. 러시아혁명이 낳은 충격파가 동방을 휩쓸었고, 5년 뒤에 중국의 노동자계급과 농민이 현실의 속박을 끝장내기 위해 일어섰다[1925~27년 중국혁명]. 하지만 인터내셔널은 바쿠 시절처럼 투쟁도구 역할을 지속할 수 없었다. 트로츠키의 표현에 따르면, ‘패배의 거대한 조직자’ 역할을 한 스탈린의 통치 아래 코민테른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출처: 프랑스 혁명적노동자조직 LO(노동자투쟁) 주간신문 2020년 9월 16일자

<노동자투쟁> 온라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