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적 노동자 그룹 LO(노동자투쟁)의 주간 신문 기사를 미국 스파크 그룹이 영어로 번역했고, 이를 우리가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2월 1일 쿠데타는 5년 동안 집권했던 아웅산 수치를 감옥에 가뒀다. 미얀마 민중은 거센 반격을 시작했다. 탄압이 점점 심해져 지금까지 시위대 중 최소 183명이 사망했고, 수천 명이 체포됐으나 반(反)군부 시위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3월 14일, 흘라잉따야 공단에 군대가 침입해 바리케이드를 불태우고 시위대에 총기를 발포해, 이 날에만 50명 넘게 살해당했다. 흘라잉따야를 비롯해 노동자 거주 지역들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특히 노동자들이 밀집한 지역에 탄압이 가해지는 이유는 노동자들(특히 젊은 섬유공업 노동자들)이 저항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영국 식민지였던 미얀마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그러나 지난 십 년간은 산업 성장률이 매우 높았다. 전통적인 천연자원 채취 산업에 덧붙여, 2000년대 초반부터는 일당 3달러[약 3,400원]라는 저임금에 이끌려 경공업 부문에도 자본 투자가 이뤄졌다.
지금은 거의 모든 유명 의류 브랜드가 미얀마에서 제품을 생산한다. 아디다스, 베네통, C&A, 갭, H&M, 리들, 프라이마크 등등... 중국이나 싱가포르의 업체를 통해 하청을 받는다. 현재 미얀마 인구 5천4백만 명 중에서 섬유와 식품 산업 노동자들은 최소한 백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주로 여성노동자들이다.
지난 십 년간 미얀마 노동계급은 빠르게 성장했다. 이들 중 다수는 토지 수용이나 2008년 사이클론 나르기스(인도양에서 발생하는 태풍은 사이클론이라고 부른다.) 피해 때문에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다. 이들은 이른바 “국내 이민자들”이라 불리며 도시 변두리의 판자촌에 산다. 지난 십 년간, 이들은 여러 번 파업하고, 투쟁하며, 노동조합을 조직했다.
이미 쿠데타 이전에도, 많은 공장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한 노동자들을 겨냥해, 코로나 세계대유행을 핑계로 대량해고를 자행했다. 파업을 파괴하고 파업조직자들을 체포하려고 군대가 투입되고 있었다.
활동가들의 증언에 따르면, 쿠데타 발표는 노동자들에게 직접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공업지역의 어느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부가 권력을 잡으면 옛날로 돌아갈 겁니다. 우리 권리는 빼앗기고, 사장들은 다시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임금을 깎을 겁니다. 우리 예상은 그렇습니다.”
2월 6일, 파업과 시민불복종 호소가 나온 다음 독재 정권에 맞선 최초의 공개 시위가 벌어졌다. 노동자들이 그 시위를 조직했다. 노조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든 노동자에게 열려 있는 회의를 개최해, 노동권, 즉 독재 정권 아래서 잃어가고 있는 권리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2월 5일, 노동자들은 시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다른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흘라잉따야에는 대략 300개 공장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노조가 있는 공장에서는 노조가 파업을 조직했고 모든 노동자가 동참했습니다. 노조가 없는 공장에서는 노동자 개개인들이 작업장을 나와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그래서 인원이 엄청 많았습니다.”
중국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인터넷 신문인 중국노동통신(China Labor Bulletin)에서는 이전에 파업을 지지한 적이 한 번도 없던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말을 전했다. “쿠데타 이후 첫 며칠간은 특별히 반응이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지도해주고 군부를 꾸짖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의류노동자들이 총알과 몽둥이가 날아들지 모르는 가운데서도 거리로 나가는 걸 보고 감명받았습니다. 우리도 용기를 얻어 같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외부에 알려진 정보가 너무 적기 때문에, 미얀마 노동계급의 저항운동 규모와 계급의식 상태를 측정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노동자들 중 일부가 쿠데타를 착취가 강화될 위협으로 보고 자신들만의 수단으로 저항하기로 결심한 것은 확실하다. 보가드 란제리의 한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1순위는 독재자를 끌어내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군사정권 아래에서는 우리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권리도 없을 겁니다.”
<노동자투쟁> 온라인 기사, 2021년 4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