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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 칼 마르크스
사설
 

국회판 사회적 대화는 노동자 노리는 덫


  • 2025-09-18
  • 42 회


격주간 철도 현장신문 <노동자투쟁> 1면 사설, 2025년 9월 10일


민주노총 지도부가 국회판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겠다고 결정하자 이재명 정부, 부자 언론, 자본가 단체 모두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결정은 명백히 잘못됐고, 수많은 노동자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왜 그런가?


노사정위의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합의


부자 언론들은 마치 집 나간 탕아가 오랜만에 돌아온 듯이 민주노총이 26년 만에 사회적 대화 테이블에 돌아왔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26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 


1990년대 말 김대중 정부는 IMF 위기를 극복하려면 노동자도 희생해야 한다, 80%가 살려면 20%가 희생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민주노총 안에서 강한 반대가 있었지만, 상층 관료들은 노사정위에서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를 합의해 버렸다. 이후 쌍용차를 비롯해 수많은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를 당해 피눈물을 흘렸고, 한국은 비정규직이 흘러넘치는 ‘노동 지옥’, ‘자본 천국’이 됐다.


사회적 대화란 자본가들과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부가 노동 착취 강화를 관철하는 도구라는 점을 수많은 노동자가 온몸으로 느꼈고 계속 비판했다. 그래서 역대 정부가 지난 26년 동안 끊임없이 유혹했어도 민주노총 관료들은 26년 동안 노사정위에 다시 들어갈 수 없었다.


이재명 정부니까 사회적 대화가 다를 수 있다?


‘사랑하면 눈이 먼다’는 말이 있다. 이재명 정부에 애정을 느끼는 민주노총 지도부는 지금 눈이 멀었다. 그래서 노동자의 눈으로 상황을 냉철히 인식하지 못하고 ‘사회적 대화’에 환상을 품고 있다.


이재명은 이제 기회만 되면 ‘고용유연성(=쉬운 해고)’을 말하고 있다. 조기대선 직후에 열린 6월 5일 국무회의에서 고용유연성 등을 대대적이고 지속적으로 공론화해 사회적 대타협 방안을 모색하라고 노동부에 지시했다. 이를 위해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인 김영훈을 노동부장관에 앉혔다. 


그리고 며칠 전인 9월 4일, 양대 노총 위원장을 불러 “우리도 이제 고용유연성을 논의할 때가 됐다”고 거침없이 얘기했다. ‘고용유연성’이란 공기업·대기업 정규직을 포함해 모든 노동자를 쉽게 해고하겠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을 성과에 따라 A,B,C 등급을 매기고 성과가 낮다는 구실로 자본가 맘대로 해고하겠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이런 ‘쉬운 해고’를 도입하려 했기에 노동자들이 강력하게 반발해 막아냈는데, 이재명 정부가 지금 이런 쉬운 해고를 도입하자며 양대노총 지도부를 유혹하고 있다.


누군가는 경사노위(노사정위 후신)와 국회판 사회적 대화는 다르다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다르지 않다. 자본가들과 정부 관료들이 주도하고, 양대노총 관료가 들러리로 참여하는 양상은 완전히 같다. 그리고 국회도 행정부처럼 지배 계급의 이익에 충실하다. 올 3월에 국회가 여야 합의로 왕창 더 내고 찔끔 더 받는 연금개악안을 통과시켰던 것이 그 증거다.


사회적 대화란 지배 계급의 계급투쟁 도구


이재명은 양대 노총 위원장을 만나 “노동존중 사회와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며 경사노위에 참여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자본가의 이익과 노동자의 이익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이것을 노동자들은 날마다 몸으로 느낀다. 자본가들은 임금을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 한다. 인력을 한 명이라도 더 줄여 남는 인력을 최대한 쥐어짜려 한다. 그리고 비정규직을 최대한 늘리고, 정규직도 마음대로 자르고 싶어 한다. 따라서 “노동존중 사회와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는 말은 자본가의 명명백백한 노동착취를 감추고, 노동자들을 고분고분한 임금노예로 만들기 위한 뻔한 거짓말이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사회적 대화에 목을 맬수록, 자본가들과 정부는 민주노총이 덫에 걸렸다고 판단하고, 때로는 야금야금 때로는 거침없이 노동자들을 공격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노동자들이 ‘또 하나의 덫’이자 ‘또 하나의 계급지배 도구’인 ‘사회적 대화’를 경계하고, 현장에서부터 단결투쟁력을 강화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