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들 한다. 진짜 그럴까? 민주의 원뜻은 민중이 주인이라는 것이다. 만약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면 노동자 민중은 지금 봄꽃 축제를 보러 가는 사람들처럼 신명나야 할 텐데 과연 그런가?
지배자를 선출하는 절차
국회의원 후보로 등록하려면 1,500만 원을 기탁금으로 내야 한다. 총선 비용은 1인당 평균 2억 2천만 원으로 제한돼 있는데, 실제론 더 많이 들 것이다. 평범한 노동자가 이런 거액을 마련하긴 쉽지 않다. 그래서 선거엔 대체로 가진 자들이 출마한다.
300만이 넘는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선거일에도 쉴 수 없다. 5인 이상 사업장 노동자라도 장시간, 고강도 노동과 이어지는 가사‧육아노동 등 때문에 선거에 관심을 많이 쏟기 어렵다. 언론방송은 대부분 가진 자들의 편이라, 주요 자본가 정당 후보들만 주로 보도한다.
국민의힘은 물론 민주당도 자본가 정당이다. 김대중 정부의 공공부문 민영화, 노무현 정부의 비정규직 확대,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무력화(산입범위 확대 개악)를 보라! 주요 자본가 당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선거는 4-5년에 한 번씩 지배자를 선출하는 절차일 뿐이다.
싸우는 형제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차이가 아무리 커 보여도 그들은 모두 자본가계급의 이익에 충실한 ‘싸우는 형제들’일 뿐이다. 조국의당, 이준석 개혁신당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강경파, 온건파로 역할을 분담한다. 자본가계급은 난폭한 정치인을 앞세워 노동자들을 탄압하다가 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질 땐 온건파 정치인을 내세워 불만을 잠재우며 지배체제를 유지한다.
게다가 정치권력의 핵심은 국회가 아니라 군대와 경찰에 있다. 국회는 부자감세 등 자본가를 위한 법은 재빠르게 통과시키지만, 노동자를 위한 법은 하나도 통과시키기 어려운 잡담가게일 뿐이다. 168석을 가졌어도 민주당은 의지가 별로 없고, 윤석열은 거부권까지 행사해 노란봉투법, 이태원참사특별법 등이 휴지조각이 된 걸 보라.
더 넓게 보면, 삼성 이재용, 현대차 정의선 같은 자본가들이 이 사회의 실세다. 노동자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그들이 쥐고 있다. 정의선은 불법파견 대법원 판결조차 무시하고, 이재용은 수십 가지 대형범죄를 저지르고도 무죄 판결을 받지 않는가? 문재인은 이재용을 가석방해주고 윤석열은 그를 사면해줬다. 이처럼 자본가들이 정치도 주무르고 있는 자본가 세상에서, 선거로 노동자의 삶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고 덫이다.
난폭한 노예주보다 온건한 노예주가 낫다?
중요한 건 선거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투쟁의식을 되찾는 것이다. 우리의 힘은 항상 집단적 투쟁과 파업, 시위에서 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령, 이 땅을 뒤흔든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저임금, 장시간 노동과 무노조의 야만에서 많은 노동자가 약간이라도 벗어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노동자는 차와 배를 만들고, 기차와 지하철을 굴러가게 하며, 환자를 돌보는 등 사회의 모든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고 있기에 경제위기, 환경파괴, 전쟁으로 가득한 세상을 완전히 바꿀 힘도 갖고 있다.
그런데 진보당이 국회의원 뱃지 몇 개를 노리고 민주당 위성정당 건설에 동참하고 있다. 이것은 노동자의 힘으로 자본가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민주당의 2중대가 되어 자본가 세상을 함께 관리하려 하는 것이다. 녹색정의당은 민주당 위성정당에 동참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정책연합, 지역선거구 연대 등으로 민주당과 협력하려 한다. 저들은 난폭한 노예주보다는 온건한 노예주가 더 낫지 않는가라는 식으로 노동자들에게 호소하며 임금노예 체제를 사실상 유지하려 한다. 노예의식에 물든 이런 개량정당들로는 노동자의 삶을 바꿀 수 없다.
노동자의 삶은 오직 노동자들의 폭넓은 단결과 투쟁을 통해서만 바꿀 수 있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에겐 모든 자본가 정당으로부터 독립적이며, 노동현장에 기초해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일관되게 대변하는 진짜 노동자당이 필요하다. 당장은 어려워 보일지라도, 노동자의 진짜 희망은 여기에 있다.
격주간 철도 현장신문 <노동자투쟁> 1면 사설, 2024년 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