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티앙 카리옹 감독의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2005)는 1차 대전 중 실제로 벌어진 ‘1914년 크리스마스 휴전’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야만적 전쟁 속의 따뜻한 인류애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진짜 적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프랑스, 영국, 독일의 어린 학생들이 교실에서 서로에 대한 증오와 애국주의 선동을 암송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는 지배계급이 교육이란 장치로 평범한 사람을 어떻게 전쟁의 도구로 길들이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당시 1차 대전은 자본주의 열강들이 식민지와 자원을 더 차지하기 위해 벌인 세계 재분할 전쟁이었고, 그 대가는 노동자와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민중이 치러야 했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진 1914년 12월, 서부 전선은 그야말로 죽음과 공포가 가득한 지옥이었다. 그러나 성탄 전야, 영국(스코틀랜드) 군인들의 백파이프 연주에 독일군 테너의 노랫소리가 화답하며 전투는 잠시 멈춘다.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무기를 내려놓고 참호 밖으로 나와 서로 초콜릿과 술을 나누고,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함께 축구하고, 전사자들을 매장한다. 그들은 그 순간 깨닫는다. 바로 어제까지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었던 상대가, 사실은 자신과 똑같이 가족을 그리워하고 전쟁으로 고통받는 피지배 계급이라는 것을. 영화 속 프랑스 군인이 자신의 상관에게 “집에서 칠면조나 뜯으며 명령하는 자들보다, 저 참호 속의 독일군이 내게는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라는 항변은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보여준다.
전선 곳곳에서 펼쳐진, 군인들의 이런 연대는 각국 지배자에겐 큰 위협이었다. 군 수뇌부는 군인들의 교류를 ‘배신’으로 규정하고, 휴전에 참여한 부대를 강제 해체하거나 가장 위험한 전선으로 전출시킨다. 지배계급이 두려워한 것은 적군의 승리가 아니라, 전쟁터로 끌려온 노동자, 농민 출신 병사들이 서로 단결해 자신들에게 맞서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군인들이 우연적 계기로 인간적으로 연대하는 것을 넘어 자신들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지배계급과 체제에 맞서 정치적으로 조직되는 모습까지는 보여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전쟁을 멈출 수 있는 잠재력이 어디에 있는지, 노동자 민중이 맞서 싸워야 할 진짜 적은 누구인지를 잘 보여준다.
월간 정치신문 <노동자투쟁>(서울) 74호, 2026년 1월 26일